쉼표
불행한 사회 속 누리는 행복이란 본문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따뜻하고 훈훈한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의 풍경이다. 서툴고도 풋풋한 사랑을 시작한 소녀와 아직은 소녀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뚝뚝한 소년이 그려내는 따뜻한 그림이다.
▲<동백꽃>의 마지막 장면. (출처 :중2국어교과서 허지은 작가)
그런데 이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농촌이다. 일제가 본격적으로 수탈을 자행해 흉흉하던 시절이다. 게다가 점순이는 하필 마름의 딸이다. 마름은 조선후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토지 관리인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 이후 일본인 지주가 늘어나면서 그 수가 증가했다. 일본인 지주 대부분이 부재지주였던 탓이다. 그렇게 보면 점순이의 아버지도 친일 부역자였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어쩌면 점순이가 누리던 풍요는 불행한 사회였기에 얻을 수 있던 부산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불행한 사회에서 풍요를 누린 사람들
“대한민국은 연좌제를 금지한다.”
일제부역자 이완용의 후손이 압류된 재산을 대상으로 재산 반환소송을 제기하면서 나온 말이다. 말 자체는 맞는 말이다. 그래서 친일파에 대한 해묵은 감정을 차치하고 법원은 이완용 후손의 손을 들어주었나 보다. 그 결과 다른 친일파 후손들도 3000억 원 규모의 재산환수소송을 진행했다. (물론 2013년에 그들은 패소했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 감소는 덤이다.
일제부역자 후손들은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달리 풍요를 누렸다. 풍요를 즐기는 것 자체를 죄라고 할 수 없다. 누구든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있는 법이다. 다만 그 풍요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외면하지 말라는 거다. 그들의 조상이 후손에게 선물한 풍요는 불행한 사회를 만들고 난 부산물이다. 그렇기에 일제에 부역한 책임에 후손도 자유롭지 못하다.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때 채무도 함께 상속 받듯이, 일제부역자의 재산을 상속을 받았으면 반역에 대한 책임이라는 의무를 지는 건 당연하다.
연좌제가 아니라 동조자에 대한 책임
일제부역자 후손들은 직접 죄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죄의 단물을 받아 마신 암묵적 동조자였다. 암묵적 동조자에게도 당연하게도 책임이 있다. 이런 류의 공범은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 이번 국정 농단의 주인공, 최순실의 딸, 정유라다. 그녀는 붙잡힌 이후 “이 모든 것은 엄마가 한 짓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변명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는 최순실이 포탈한 세금으로 승마를 즐기고 명품으로 도배하면서 풍요를 누렸다. 게다가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유명 대학에 노력도 없이 졸업했다.
불행한 사회를 만들면서 생긴 그 풍요는 불행한 사회에 대한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 돌아가선 안 된다. 그 풍요는 혼자서 쓸슬히 죽어가던 노인에게, 생리대가 없어 수건을 깔고 울면서 누워 있던 아이에게,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굶어죽어가던 일가족에게 돌아갔어야 했다. 암묵적 동조자들은 결국 그들의 몫을 빼앗은 셈이다. 과연 공범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불행한 사회를 만든 책임의 무게란
불행한 사회를 만든 책임의 무게를 짊어지고자 한 사람도 있었다. 일제 부역자 민영은의 외손자 권호정씨다. 그는 일제 부역자 자손들의 연이은 재산반환소송을 “더 모범적으로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며 비판했다. 그는 일제부역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건 죄가 아닐지라도 풍요를 누린 만큼의 책임을 지고 더욱 바르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정도까지는 안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행복이 악덕에서 만들어졌다는 자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일제부역자 민영은의 후손 권호정씨와 그의 동생. 친척들이 토지반환소송을 진행하는 것에 반대운동을 진행하는 모습이다.
점순이는 아직 어리다. 어린 만큼 무지 속에서 그 풍요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었다면 나이를 먹은 만큼의 성찰이 필요하다. 정유라 말고도 암약하는 수많은 암묵적 동조자들에게 필요한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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