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를 읽어보자

인물이 기억나지 않아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

도르비 2022. 2. 5. 11:38

 

 

<미생>의 작가 윤태호는 캐릭터를 철저히 설계하기로 유명하다. 그렇게 설계해놓는 이유에 대해 “그렇게 해두면 캐릭터들이 알아서 뛰논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이름난 작가들 중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캐릭터들이 뛰노는 걸 자신은 글로 따라갈 뿐이라고. 설계가 치밀하다 보니 그들의 작품에선 인물이 선명하다. 인물의 행동과 발언이 이해가 잘 되면서 충분히 개성이 있다는 뜻이다. 특히 소설은 다른 매체와 달리 독자가 이야기를 자신의 내면에서 구성하면서 서사를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치밀한 인물 구성이 없다면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힘들 수도 있다. 혹은 상상의 여지가 줄어드니 좀 심심할 수도 있다.

<센 강의 이름 모를 여인>은 그런 의미에서 ‘좀 심심한’ 소설이다. 유려한 표지에 반해서 구입한 이 소설은 표지만큼 유려하진 않았다. 문장은 간결했고 이야기의 흐름은 명쾌하게 흘렀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스토리텔링에 무게를 두고 쭉쭉 전개되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오래 붙잡을 필요 없이 빠른 속도로 잘 읽혔다. 다만 이 소설에선 이야기는 있어도 인물은 없었다. 주인공도, 피해자도, 살인자도 지극히 평면적인데다 그들의 행동 서사가 구멍투성이다. 주인공 록산은 왜 이런 이상한 사건에 집착을 하는지, 살인자는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보통 규범일탈을 어필하기 위에 법과 관련있는 사람을 죽여왔으면서, 하필 그 소설가를 제물로 삼았는지, 왜 임신을 했는지 등 설명되지 않는 행동들이 많다.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기 쉽게 하기 위해 근무 영역에서 벗어난 근신형사 라는 타이틀을 부여했고, 살인의 이유를 설계하기 어려워서 대충 미친 사람이라고 뭉뚱그린 것으로 보일 정도다.

부족한 캐릭터성은 독자를 심심하게 만든다. 이건 어떤 매체의 텍스트인지는 관계없다. 잘 설계된 캐릭터는 그것 자체로 서사성을 지니기 때문에 비록 스토리 흐름에 구멍이 생기더라도 캐릭터의 서사로 어느 정도 설명이 되곤 한다. 가령, 해리포터 시리즈의 경우 볼트모트가 대악당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활약이 협소하다던가, 해리 포터의 활약에서도 우연에 의지한 전개가 많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질감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 속에 등장하는 인물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보니 독자의 상상력으로 그 구멍을 메우기 때문이다. 또한 이야기를 다 읽고 난 이후에도 독자의 활동이 이어질 수 있다. 인물의 설정을 토대로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해리는 어떻게 했을까? 이후엔 어떻게 됐을까? 등 재구성해보는 활동이다.

물론 스토리텔링형 소설이 의미가 없진 않다. 사건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인물의 세세한 이해는 필요 없고 맥락만 따라가서 피로감 없이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듯한 재미를 얻는 셈이다. 서사 문학의 본문은 ‘재미’를 주는 것이기에 그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같은 서사 장르라고 해도 매체에 따라 기대하는 바가 달라진다 한때 순수소설계에서도 판매량 부진을 만회해 보려고 영화적으로 소설을 구성하는 시도를 했지만 반응이 미진했던 것만 봐도 그렇다. 아무래도 독자가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읽어야 하다보니 그만큼 주동 인물 및 반동 인물에 대한 사고가 깊어지게 되고, 그들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많아지다 보니 인물 설정 구멍을 더 크게 느끼는 탓으로 보인다.

기욤 뮈소도 캐릭터성 구축을 나름 노력한 흔적은 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자신의 작품들의 세계관을 연결해 보려고 했다. 이전에 주역에 가까웠던 인물을 이후 작품에 엑스트라나 조연으로 등장 시키는 식이다. 마치 영화 까메오 출연 연출을 흉내낸 모양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정작 본 서사에서 인물은 스토리의 거치대일 뿐, 전혀 주역으로 활약하지를 못하는데. 그러다 보니 캐릭터 교차 등장이 자신의 다른 작품을 팔아먹기 위한 상업적 의도로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