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이야기

역사는 반복된다 - 이광수와 한경오

도르비 2017. 5. 26. 01:12




과거의 계몽주의자, 이광수



이광수는 계몽주의자였다. 지식인들은 많이 아는 만큼 앞장서서 조선이 힘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광수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그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벗어나 자립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광수는 친일파다. 한때 많은 조선 학생들에게 이상적인 운동가였던 그는, 앞장서서 조선을 키우는 대신 앞장서서 일본을 추앙했다.

 


그의 변심은 예고된 재앙이었다. 함정은 계몽주의에 있었다. 계몽주의는 엘리트의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뛰어난 엘리트가 우매한 민중들을 깨우치게 한다는 사고방식은 절대 평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봉건제도를 혁파하고 남녀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던 것과 모순된다. 그리고 그런 고고한사고관을 따라가기에 민중들은 살아남기에도 벅찼다. 현실과 동떨어진 계몽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계몽주의의 실패를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게 옳은 방향일 것이다. 그러나 이광수는 다르게 반응했다. “조선인들은 미개하다.” 그는 자신의 오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친일은 실패를 인정하는 대신,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탓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챙기려는, 일종의 아집이었다.


 

과거에 살고있는 계몽주의자, 한경오



실패한 계몽주의자의 아집은 요즘에도 보인다. 소위 한경오라 일컬어지는 진보 언론에서다. 오마이뉴스의 문재인 대통령 호칭문제에서 시작해, 한겨래 안수찬 편집장의 덤벼라 문빠들로 갈등이 본격화됐다. 앞에서 반성 하나 했지만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갈등은 더 심각해졌다. 한겨레 쪽에서는 독자들이 아예 소액주를 모아 임시 주총을 열어 압력을 행사하려고 움직이고 있기도 하다.


한경오의 패착은 아직까지도 계몽주의자의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지몽매한 민중들은 문재인의 밝은 면만 보고 빠질을 하니 이들의 눈을 트여 줘야 한다고 본다. 이미 그들의 태도에 대한 비판은 예전부터 존재했었다. 강준만의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는 그런 부분을 대표적으로 건드렸다. 책이 출간됐을 때는 특히 한겨레가 구조적 문제를 마치 개인의 싸가지 문제로 한정짓는다고 날 세워 비판했다. 하지만 강준만 씨의 글은 진보의 실패를 건드린다기 보다는 한경오를 포함한 구 운동권 계몽주의자들의 태도를 지적하고 있었다. 오히려 한겨레는 비판이 아닌 자기 반성을 해야 했던 처지다.

 

과거에도 이미 계몽주의는 실패했었다. 현재에는 더욱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지식의 공급이 한정적이었지만 이제는 너도나도 대학물을 먹은 처지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기자가 되진 않는다. 좀 더 전문화된 각자의 일에 종사한다. 갖고 있는 지식 분야가 다를 뿐 누구나 전문가다. 즉 과거와는 달리 사람들은 훨씬 똑똑해졌다. 그런데 한경오 등 진보언론은 예전부터 가르치려고 드는 논조를 지적받아왔다. 기사가 점점 논문처럼 읽기 어려워진다는 평도 증가했다. 여전히 계몽적인 태도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반복할 것인가, 고리를 끊을 것인가.




실패는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한경오는 과거 이광수의 행위를 답습하고 있다. 스스로의 패착을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민들을 탓한다. “덤벼라 문빠들은 한경오가 여태껏 보여준 계몽적 태도에 대한 반감을 폭발시킨 방아쇠였다. 그 결과가 지금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자신들이 여전히 옳으며, 문빠들의 환상을 부숴주어야 한다는 그들의 아집은 과장·왜곡 기사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사실을 과장한 기사가 현재 여당 인사를 공격하는 프레임으로 이용되고 있기도 하다. 소위 진보언론이라는 집단이, 정 반대 진영에게 소스를 제공해주고 있는 셈이다.


민중 탓을 하며 친일을 정당화한 이광수, 시민들을 비난하며 적폐 집단 중 가장 꼭대기에 있는 자한당을 지원하는 걸 중립이라 외치는 한경오. 둘의 모습은 지금 상당히 닮지 않았는가? 역사를 반복할 것인지, 그 고리를 끊을 것인지는 앞으로의 한경오들의 행보에 달려 있다.